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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화학 15. 팀워크와 독창적인 발상이 밝혀낸 DNA 구조

1.1953년 2월 21일, 영국 케임브리지대 카벤디시연구소 근처의 이글이란 작은 식당을 문을 열고 한 젊은이가 뛰어들며 외쳤다. 밝혀냈다고.” 식당 안의 손님들이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동안 뒤이어 비쩍 마른 젊은이가 또 한 명 들어섰다. 그 두 젊은이는 이 식당의 단골손님들이었으며, 방금 자신들이 엄청난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고 떠벌였다. 당시 그들의 말을 믿은 사람은 별로 없었겠지만, 그것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약 2개월 후인 4월 25일 영국의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그들이 발표한 900 단어 분량의 아주 짧은 논문 한 편이 실렸다. “우리는 여기에 DNA의 구조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 구조는 생물학적으로 대단히 흥미 있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 그 논문에는 자신들의 연구결과가 마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단서가 됐던 ‘로제타스톤’을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라고까지 써놓고 있었다. 논문의 발표자는 바로 카벤디시연구소의 풋내기 연구원인 제임스 왓슨(25세)과 그보다 열두 살이나 많았던 늙다리 대학원생 프랜시스 크릭이었다. 그들의 호언장담대로 그 논문은 과학계에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다. 논문에서 그들이 밝힌 DNA 이중나선구조의 발견은 20세기 인류가 이룩해 낸 가장 큰 과학 성과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이 발견을 계기로 생명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주무를 수 있게 되는 분자생물학이 생물학의 가장 큰 기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그들의 성과는 남의 연구성과들로 이루어낸 우연과 행운의 결과였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 이유는 당대 최고 과학자들과 겨룬 연구 과정을 추적해 보면 잘 드러난다. 당시 록펠러의학연구소의 에이버리와 콜드 스프링 하버연구소의 허쉬&체이스가 유전물질이 DNA임을 밝혀냈다. 하지만 DNA처럼 단순한 물질이 어떻게 복잡한 유전 형질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았다. 이 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DNA의 구조를 밝혀 유전자 복제 메커니즘을 설명해야만 했다. 따라서 많은 과학자들이 DNA의 구조를 밝히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다. 미국의 유명한 물리화학자 라이너스 폴링 및 영국 킹스칼리지 연구소의 윌킨스와 프랭클린 등이 그런 연구진 중의 하나였다. 이에 비해 아직 변변한 연구성과조차 없었던 왓슨과 크릭이 이 같은 연구과제에 도전한 것은 매우 무모한 짓이었다. 또 하나 이들의 연구성과에 대해 비판의 시각을 갖게 한 것은 남의 아이디어와 연구결과를 합친 것에 불과한 업적이 아니냐는 점이다. 실제로 왓슨과 크릭이 DNA가 나선 모양일 거라고 추측한 것은 당시 폴링 박사가 제안한 단백질의 폴리펩티드 사슬과 나선구조의 결과에서 힌트를 얻었다. DNA가 이중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아이디어는 DNA의 구성성분 중 항상 아데닌의 양과 구아닌의 양이 같고 티민의 양은 시토닌의 양과 같다는 샤가프의 법칙에서 얻어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힌트는 프랭클린이 찍은 DNA의 X선 회절 사진이었다.  

 

2. 킹스칼리지 연구소에서 함께 일했던 윌킨스와 프랭클린 사이에는 같은 연구를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충돌이 있었다. 그로 인해 윌킨스는 친구였던 크릭에게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사진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왓슨과 크릭이 DNA가 이중나선구조임을 확신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때문에 왓슨과 크릭은 후에 ‘남의 영광을 도둑질했다'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왓슨과 크릭이 연구에 성공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성공 이유가 있었다. 1928년 4월 6일 시카고에서 태어난 왓슨은 지적인 면에서 풍족하게 자랐다. 채무 수금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조류관찰을 했던 아버지로 인해 일찍부터 조류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키고 대학의 입학 담당 사무원으로 일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카고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왓슨은 22살 때에 인디애나 대학에서 바이러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유럽으로 연수를 떠나 코펜하겐 대학의 생화학자인 칼카 교수 연구실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 왓슨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진로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다. 대학생 때 읽은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유전학의 비전을 알게 된 왓슨은 이때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카벤디시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기로 한 것이다. 거기서 맞닥뜨리게 된 이가 바로 크릭이었다.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왓슨은 유전자의 구조를 함께 연구하기로 결정할 만큼 크릭과 의견이 잘 통했다. 성공의 첫 번째 이유는 이처럼 서로 다른 전공자들의 공동연구 덕분이었다. 동물학에서 생화학자로, 다시 생물학자로 변신한 왓슨과 물리학자였던 크릭은 공동연구와 팀워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다. 두 번째는 이들의 도전적인 진취성이었다. 왓슨은 경쟁심이 강하고 도전적이며 관습과 전통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어떤 권위나 이론들도 왓슨의 독창적인 생각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즉, 젊고 학문적으로 미숙했기에 왓슨은 더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었다. DNA 사슬이 똑바로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 비틀려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발상의 전환도 그렇기에 가능했다. 더불어 왓슨은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글쓰기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왓슨은 DNA의 구조를 밝힌 공로로 크릭 및 윌킨스와 함께 1962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 후 1968년 왓슨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이중나선’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주목을 끌었다. 그로 인해 세 명의 공동수상자 중 가장 어리고 경력이 적은 왓슨이 훨씬 더 유명해질 수 있었다. DNA 구조 발견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와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왓슨은 콜드 스프링 하버연구소의 소장이 된 후 또 한 번 그 능력을 발휘했다. 부임 당시 하버연구소는 예전의 명성에 비해 재정 상태나 규모가 아주 나쁜 상태였는데, 왓슨은 암의 유전학 분야에 연구소 역량을 집중하고 놀라운 연구비 모금 능력을 발휘해 기반을 튼튼히 했다. 왓슨 재임 기간 동안 하버연구소는 유전자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은 물론 규모나 재정면에서도 세계적인 연구소로 재도약할 수 있었다. 한편 왓슨은 인간게놈프로젝트(HGP)를 제창하여 1988년 HGP 초대 소장을 맡기도 했다. 유명한 연구 주제를 발굴하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증명한 셈이다. 왓슨은 지금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찬성 의견을 표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