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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화학 17. 창의성과 끈기가 만들어낸 이상한 알약

1.1960년 5월 9일 미국에서는 그때까지 전혀 볼 수 없던 이상한(?) 약이 출시되었다. 이상한 점은 약의 형태나 성분이 아니었다. 바로 약과 함께 첨부된 ‘의약품 설명서’였다. 소비자들이 약을 사면서 처음으로 구경하게 된 그 최초의 의약품 설명서는 더구나 약 복용 시 있을지도 모를 부작용에 대해 당당히 명시하고 있었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약의 부작용에 대해 명시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건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약이 파격적이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 약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시판 허가를 받고 출시된 완두콩만 한 그 알약의 정체는 인류 최초의 먹는 피임약인 ‘에 노비드’였다. 존 브록만이 엮은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란 책에서, 먹는 피임약은 세계 지성 110명이 선정한 인류의 위대한 발명 121가지에 당당히 선발되었다. 위스콘신대학의 인류학자 레포스키 교수는 이 약이 왜 그처럼 위대한지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인구폭발로 인한 재앙에서 벗어나게 된 점과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레포스키 교수의 지적은 정확하다. 미국의 경우 1900년대 가구당 평균 자녀수가 3.5명이었는데 먹는 피임약의 기여로 인해 1970년대 2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 이보다 더 큰 사회적 영향은 여성을 원하지 않는 임신과 양육의 의무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먹는 피임약으로 인해 여성은 스스로 생명체의 본질인 번식의 의무를 거부하고 피임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그 후 성은 생식의 차원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수단이자 쾌락의 최고 도구로 떠올랐다. 또 여성들은 교육이나 직장 등의 이유로 임신을 미룰 수 있는 방법이 생김으로써, 사회적인 진출이 활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정해진 시간에 맞춰 먹기만 하면 99%에 가까운 피임률을 보이는 먹는 피임약으로 인해 1960년대 후반부터 성해방과 여성해방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에 노비드를 탄생시킨 주인공은 미국의 내분비학자 그레고리 굿윈 핀커스였다. 그가 먹는 피임약의 연구에 뛰어들게 된 것은 미국가족계획연맹을 이끌던 마거릿 생어의 권유 때문이었다. 생어 여사는 효과적이면서 간편하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피임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임자를 찾던 중 핀커스 박사를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3년 4월 9일 뉴저지주 우드바인에서 러시아계 유대인인 양친 사이에서 태어난 핀커스는 모리스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 코넬대학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그는 하버드대, 클라크대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핀커스는 성호르몬 스테로이드 대사 분야의 전문가로서 실험생리학연구소 웨스터재단의 창립을 도왔는데, 생어 여사와의 만남은 동연구소장으로 근무할 때 이루어졌다. 1930년대에 이미 야생 토끼의 난세포를 체외수정시켜 ‘프랑켄슈타인을 만드는 박사’라는 비난을 받았던 바 있던 그는 생어 여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흔쾌히 연구에 착수했다. 생어 여사는 그에게 자선가이자 재벌이었던 카타린 D. 매코믹 여사를 연구 후원자로 주선해 주었다. 인류에게 있어 피임의 역사는 매우 길다. 기원전 1850년경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에는 악어의 배설물에 꿀을 배합해 성교 전에 여성의 질에 넣었다는 기록이 있고, 히포크라테스는 야생 당근의 씨를 먹으면 임신이 예방된다고 했다. 중세 사람들은 동물의 창자나 물고기 껍질로 콘돔을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1840년대 고무의 발명으로 콘돔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콘돔은 원치 않은 임신을 종종 발생시켰고, 또 남성이 사용하지 않을 경우 여성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안전하고 믿을 만한 피임법으로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게 페서리였으나, 그 역시 실제 선호도에 있어서는 호응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핀커스 박사 이전에도 먹는 피임약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아이디어를 내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7년의 호르몬 피임법 발명이었다. 메이크피스 등의 과학자들이 여성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을 동물에 주사하면 배란이 억제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그러나 주사라는 투입 방법과 상당히 비쌌던 프로게스테론의 비용 때문에 피임법으로서는 전혀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 외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호르몬 피임법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핀커스가 최종적인 성공을 움켜쥘 수 있었던 것은 창의성과 끈기라는 그의 두 가지 장점 때문이었다. 핀커스는 연구에 착수하자마자 프로게스테론을 입으로 먹는 알약으로 만든다는 창의적인 발상을 했다. 황체호르몬이라 불리는 프로게스테론은 임신이 되면 농도가 높아져 임신을 유지시키며 배란을 억제한다. 그럼 정상인에게 이 호르몬을 투여하면 임신이 되지 않고도 임신된 것처럼 배란을 억제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웨스터재단의 M.C. 창이라는 연구원이 그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핀커스는 그를 연구진에 합류시켰다. 더불어 그의 연구에 비용의 실용성이라는 날개를 달아주는 이도 곧 나타났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의 러셀 마커 교수가 1943년에 프로게스테론을 싼 값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러셀 마커 교수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산에서 자생하는 백합과 식물인 ‘얌’에 스테로이드 물질인 디오스게닌이 대량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실험실에서 이를 프로게스테론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핀커스는 산부인과 의사인 존 로크에게 이와 같은 프로게스테론을 입으로 넣었을 때의 배란 억제 효과에 대한 실험을 의뢰했다. 하지만 실험 결과 두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프로게스테론은 효과적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하고, 또 실패율이 15퍼센트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핀커스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올바른 적정량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는 화학적으로 이와 유사한 화합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후 프로게스테론과 화학적으로 관련이 있는 각종 합성 스테로이드제의 샘플을 모조리 뒤지던 중 마침내 노르에티노드렐이라는 G.D. 씰사의 제품이 특히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생화학자 B. 콜튼 박사가 합성에 성공해 개발한 노르에티노드렐은 굳이 먹는 피임약을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 또 이 약이 그처럼 독창적인 데 사용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그 후 핀커스는 여기에 메스트라놀이라고 하는 또 다른 화학 약품을 조금 섞으면 더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렇게 해서 마침내 에 노비 드라는 약이 탄생하게 되었다. 핀커스는 이 공로로 1960년 미국가족계획연맹의 래스커상과 영국의 올리버 버드상, 1964년에 현대의학상 등을 받았다. 그러다 1967년 보스턴에서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은 과학자들 사이에서조차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세계의 그 어느 유명인보다 훨씬 실질적인 영향력을 현대인에게 주고 떠난 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