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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화학 18. 나치의 에너지, 액화석탄

최근 인도는 인공위성 발사체의 연료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금까지 인공위성 발사에 쓰이는 연료비용은 1㎞당 46달러 선. 하지만 인도는 이 비용을 무려 90분의 1 수준인 50센트로 낮추었습니다. 대체 무슨 기술을 개발한 것일까요? 해답은 바로 정제한 액화석탄이었습니다.

 

지난 3월 미국 부시행정부는 액화석탄을 대체에너지에 포함시키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2017년까지 대체에너지 공급을 대폭 늘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바이오연료 등만으로 공급 목표를 맞추기가 힘들기 때문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미국 국방성은 2016년까지 전투기 연료의 절반을 액화석탄으로 충당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를 위해 미 공군은 B52 폭격기에 액화석탄을 넣어 운항하는 실험을 지난해 12월에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또 미국 몬태나 주는 2012년까지 하루 2만 2천 배럴의 액화석탄을 생산할 수 있는 산업단지 건설을 계획하고 있고, 중국도 네이멍구에 액화석탄 공장을 건설하는 등 수년 내 최대 27개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도대체 액화석탄이 무슨 연료이기에 요즘 들어 이처럼 떠들썩한 것일까요. 액화석탄은 용어가 뜻하는 것처럼 석탄을 가지고 석유와 유사하게 만든 액체연료를 가리킵니다. 석탄으로 석유를 만들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사실 원리를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석탄이나 석유의 주성분은 똑같이 탄소와 수소입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수소의 양이 다르다는 것이죠. 즉, 석유는 수소의 비율이 13% 이상인데 비해 석탄은 5% 이하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석탄에 수소를 첨가해 주면 석유와 유사한 탄화수소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단하면서도 아주 기발해 보이는 액화석탄이 맨 처음 개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94년 전인 1913년입니다.

 

고압 화학공업 연구에 몰두하던 베르기우스가 석탄을 가루로 만든 후 고압에서 수소를 적용시켜 액화하는 실험인 베르기우스법에 성공한 것이죠. 그 후 실용화 과정을 거쳐 1927년에는 독일의 로이나에 연간 생산량 10만톤 규모의 본격적인 액화석탄 공장이 건설되었습니다. 베르기우스는 이 액화석탄 개발의 공적으로 암모니아를 고압에서 합성하는 하버-보쉬법을 개발한 독일 I.G. 파르벤사의 사장 보쉬와 함께 1931년 노벨화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베르기우스법 외에도 석탄으로 석유를 만드는 인조석유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따라서 1920년대에는 독일의 피셔와 트로프슈에 의해 석탄의 간접액화 방식인 피셔-트로프슈법이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도 저온건류법과 비촉매용제추출법 등으로 고체인 석탄을 액체연료로 변환시킬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독일이 인공석유 연구에 집착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절박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이미 석유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었습니다.

 

석유 자원이 없는 독일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원유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데, 많은 국가들이 독일에 등을 돌려 어려움을 겪은 것이죠. 그런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8년의 미국과 독일 석유소비량을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미국은 10억 배럴인데 비해 독일은 겨우 4천400만 배럴에 불과했으니까요. 하지만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1939년에는 인공석유 생산량이 하루에 7만 2천 배럴에 이렀습니다. 원유 대신 전쟁에 필요한 군용 유류의 공급이 충분해진 셈이죠. 독일이 이렇게 액화석탄의 생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 풍부한 석탄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르기우스법은 자동차나 항공기의 연료가 되는 가솔린의 생산이 가능해 인공석유 제조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럼 당시 얼마나 많은 인공석유가 생산되었을까요? 1943년 독일의 인공석유 1일 생산량은 12만 4천 배럴에 이르렀고, 전쟁이 극렬해진 1944년 초에는 독일 석유 공급량의 57%를 인공석유가 담당했습니다. 또 항공용 가솔린의 경우 95%가 인공석유로 충당되고 있을 정도였죠. 하지만 연합군 측도 독일의 이런 전략을 그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 연합군은 독일에 원유를 공급하는 생산시설을 폭격했으나 곧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습니다.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떠받치고 있는 주인공이 인공석유라는 사실을 깨달은 연합군은 제공권을 장악한 1944년 이후 로이나 공장을 비롯해 각지의 인공석유 생산시설을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1944년 9월 이후 독일의 인공석유 1일 생산량은 5천 배럴로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의 주 원유공급원이던 루마니아의 유전까지 소련군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전쟁을 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죠. 결국 독일은 1945년 5월 항복을 하고 말았는데, 당시 독일 공군의 항공 가솔린 생산량은 월 8천 배럴에 불과할 정도로 석유 생산시설이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습니다. 즉, 독일은 인공석유의 생산으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고, 또한 인공석유의 생산 중단과 더불어 전쟁을 끝낸 셈입니다. 그럼 이같이 대단한 액화석탄이 그동안 왜 주목받지 못했던 걸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전쟁 이후 중동 국가들의 원유 대량생산으로 인해 석유 가격이 매우 저렴해졌습니다. 즉, 복잡하게 석탄으로 석유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거죠. 지난 2003년까지 20년 동안 1배럴당 평균 유가는 25달러 선이었던 데 비해 액화석탄의 1배럴당 생산비용은 45달러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유가가 60달러 선을 넘어섰기 때문이죠. 따라서 석탄 자원이 풍부한 국가의 경우 액화석탄 생산에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합니다. 또한 석유보다 매장량이 훨씬 더 많은 석탄은 매장지역이 편중되어 있지 않아 정치적 불안정성이 적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액화석탄의 생산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입니다. 그 이유는 남아공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남아공은 1980~90년대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로 국제 사회의 경제제재를 받아 해외 석유기업들로부터 석유를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남아공의 백인 정권은 액화석탄 개발에 주력하여, 현재는 세계 최고의 첨단 인프라를 구축하게 된 거죠. 지금 중국에 짓고 있는 액화석탄 공장도 남아공의 에너지 기업인 ‘사솔’이 주도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액화석탄은 독일과 남아공의 경우처럼 궁한 상황에 처한 국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과 중국 등의 국가에서 액화석탄에 주목하고 있는 것도 석유가 궁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액화석탄이 또 한 번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주는 에너지로 떠오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