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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화학 23. 실록 속의 장영실은 발명가가 아니라 금속전문가

실록 속의 장영실은 발명가가 아니라 금속전문가

 

언론에서 본 과학문화 장영실(蔣英實 생몰년 미상)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위인전 등에서 다뤄졌다. 그러나 결국은 실록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고려말 원나라 때 소주(蘇州) 항주(杭州)에서 온 중국 사람이며 어머니는 기생이다.” 세종 15년(1433년)의 기록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장인(匠人)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자연 장영실도 중국어를 할 줄 알았을 것이고 그 당시 조선보다 앞서가던 중국의 금속기술 등을 어려서부터 익혔을 것이다.

 

장영실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7년(1425년)으로 직함은 ‘사직(司直)’이다. 사직이란 병조에 속한 오위(五衛)의 정 5 품관이다. 경상도 동래현의 관노(官奴)로 있다가 이렇게 높이 올라올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우리가 흔히 알 듯이 세종 덕분이라기보다는 태종 덕분이라고 봐야 한다.

 

세종 15년 기록에 세종 자신이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또한 아낀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동래의 관노로 있다가 한양으로 불려 올라와 말직에서 일하던 장영실에게 공조에 속한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정 5품관)를 특명으로 내려준 이는 세종이다.

 

상의원은 궁중의 의복과 금은 보화 등을 관리하던 기구이다. 정리를 하면 세종 5년에 상의원 별좌에 제수됐고 이후 같은 품계의 사직으로 자리를 옮겼고 세종 15년에는 세종이 장영실에게 호군(護軍)의 관직을 내렸다. 같은 오위의 정 4 품관이니 2계급 특진이었다. 위인전이 전하듯 장영실이 탄탄대로만을 달린 것은 아니다. 시련도 적지 않았다. 뇌물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종은 파격적인 감형(減刑)을 해주었다.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호군에 오른 다음해인 세종 16년 7월 1일 장영실은 누기(漏器-물시계)를 만드는데 공을 세운다. 핵심 설계자는 세종 자신이었고 장영실은 세종의 의도를 100% 실현함으로써 칭찬을 받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세종이 설마 기술을 알았을까?’라는 의심은 부당하다. 세종이 기획하고 이천과 김조 등과 같은 문신들이 기본골격을 만들면 장영실이 실무책임을 맡았다. 이는 마치 세종이 문신 맹사성을 통해 박연을 움직여 음악을 바로잡은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누기를 완성한 바로 다음날 세종은 중추원 지사 이천을 불러 호군 장영실 등과 함께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주자(鑄字)를 만들 것을 명한다. 이때 만든 주자가 20여만 자였다고 한다. 우리의 인쇄문화가 몇 단계 급상승했다. 세종 19년에는 중국의 금속전문가들이 북방 오랑캐의 포로가 되었다가 조선으로 도망쳐오자 세종은 장영실을 보내 돌에서 금과 은을 추출하는 제련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이처럼 장영실은 발명가라기보다는 일관되게 금속전문가로 활약한다. 이 때의 일로 해서 장영실은 종 3품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한다. 부호군 호군 대호군 상호군은 오늘날의 장군 서열에 해당한다. 중장에 오른 것이다. 세종 20년(1438년) 1월 대호군 장영실은 흠경각(欽敬閣)을 완성한다. “이는 장영실이 완성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이 마련한 것이다.” 여기에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등 장영실도 관여했던 각종 농업 관련 발명품들을 설치했다. 이후 장영실은 경상도 채방 별감으로 파견돼 각종 철을 캐내는 일을 맡았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온 대호군 장영실은 세종 24년 4월 파직당한다. 그가 임금이 타는 안여(安輿)의 제작 감독이었는데 안여가 부서져 내려앉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후 장영실이라는 이름도 실록에서 사라졌다. 실록이 전하는 장영실은 발명가라기보다는 금속전문가였다.